술 가이드 · 기록

시음 노트 쓰는 법: 색, 향, 맛, 여운 순서로

2026-10-19 수정

시음 노트는 남에게 보여 주려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몇 달 뒤의 내가 그 병을 다시 떠올릴 수 있으면 돼요. 그래서 잘 쓴 노트의 기준은 문장이 멋진가가 아닙니다. 읽었을 때 그 술이 다시 떠오르는가입니다. 처음부터 길게 쓰려 하면 금방 지쳐요. 아래 순서대로 한 줄씩만 채워 보면 됩니다.

색에서 여운까지 순서대로

눈으로 보고 코로 맡고 입에 넣고 삼킨 뒤를 적습니다. 이 순서가 좋은 이유는 간단해요. 마시기 전에 보고 맡은 것은 입에 넣는 순간 잊히기 쉽습니다. 먼저 적어 두지 않으면 나중에 되살리기 어렵습니다.

색은 밝은 배경에 잔을 기울여 봅니다. 옅은 짚색인지 진한 호박색인지 정도면 충분해요. 와인이라면 가장자리가 보랏빛인지 벽돌빛인지도 봅니다. 향은 잔에 코를 깊이 넣지 않아요. 잔 입구 근처에서 짧게 여러 번 맡는 편이 낫습니다. 맛은 처음과 가운데와 끝으로 나눠 보면 쓸 말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단맛과 산미가 오고 가운데에서는 질감과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끝에는 쓴맛이나 떫은맛 또는 알코올의 열감이 남습니다. 여운은 삼킨 뒤 몇 초나 남는지 적습니다. 남는 것이 과일인지 나무인지 쓴맛인지도 같이 적습니다.

  • 색은 밝기와 색조를 한 단어씩 적습니다
  • 향은 처음 떠오른 것 두세 가지면 됩니다
  • 맛은 처음과 가운데와 끝으로 나눕니다
  • 여운은 길이와 마지막에 남는 것을 적습니다

잔과 온도도 같이 적어 두기

같은 술도 잔과 온도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집니다. 입구가 좁은 잔은 향을 모아 줍니다. 넓은 잔은 알코올이 빨리 날아가서 부드럽게 느껴집니다.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화이트 와인은 향이 닫혀 있다가 10분쯤 지나면 열립니다. 위스키는 손으로 잔을 감싸 조금 데우면 향이 확 올라와요. 그래서 어떤 잔에 어떤 온도로 마셨는지 한 줄 적어 둡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의 평과 내 평이 다른 이유를 그 한 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 향과 시간이 지난 뒤의 향

잔에 따르자마자 맡은 향과 15분이나 30분 뒤의 향은 다릅니다. 처음에는 알코올이나 자극적인 냄새가 앞에 섭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뒤에 있던 과일이나 꽃이나 나무 향이 올라옵니다. 급하게 한 번 맡고 결론을 내리면 그 술의 절반만 보는 셈입니다. 노트에 '처음'과 '20분 뒤'를 나눠 적으면 됩니다. 두 줄이면 충분해요.

위스키라면 물 몇 방울을 떨어뜨린 뒤의 변화도 적어 둘 만합니다. 물이 들어가면 알코올의 열감이 줄고 숨어 있던 향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반대로 맛이 묽어져 매력이 사라지기도 해요. 어느 쪽이었는지 적어 두면 다음에 그 병을 어떻게 마실지 바로 정할 수 있습니다. 물은 한 번에 많이 넣지 않습니다. 한두 방울씩 더해 가며 비교하는 편이 좋습니다.

점수 기준은 스스로 정하기

점수를 매길 때 가장 흔한 실수는 남의 점수를 흉내 내는 것입니다. 전문가의 90점과 내 90점은 다른 기준으로 나온 숫자입니다. 같을 이유가 없어요. 대신 내 기준을 한 줄로 적어 둡니다. 예를 들면 이래요.

기준은 한 번 정했으면 한동안 바꾸지 않는 게 좋습니다. 기준이 흔들리면 작년의 4점과 올해의 4점을 비교할 수 없게 됩니다. 점수보다 '왜 그 점수인가' 한 줄이 더 오래 남습니다. 점수만 남은 노트는 시간이 지나면 아무 정보도 주지 못합니다.

  • 5점은 다시 사서 마시고 싶고 남에게도 권할 술입니다
  • 4점은 다시 마시고 싶은 술입니다
  • 3점은 나쁘지 않지만 굳이 다시 찾진 않을 술입니다
  • 2점은 끝까지 마시기 힘들었던 술입니다
  • 1점은 상했거나 결함이 있는 술입니다

짧아도 구체적으로

막연한 예부터 봅니다. '향이 좋고 부드럽다. 맛있다. 4점.' 이 노트는 어느 술에 붙여도 말이 됩니다. 그래서 아무 정보가 없어요. 반년 뒤에 읽으면 무슨 술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좋은 예는 이렇습니다. '튤립 잔, 실온. 처음엔 알코올이 세고 바닐라. 20분 뒤 익은 배와 꿀. 입에서는 달지 않고 가운데가 조금 비어 있음. 끝에 후추 같은 알싸함. 여운 짧은 편. 물 두 방울 넣으니 열감은 줄었는데 배 향도 같이 사라짐. 물 없이 마시는 게 낫다. 4점, 다시 마시고 싶지만 가격 생각하면 고민.' 다섯 줄 남짓입니다. 그런데 잔과 온도부터 시간에 따른 변화와 물의 효과까지 다 들어 있습니다. 점수의 이유도 있어요.

표현이 떠오르지 않으면 무엇과 비슷한지를 적으면 됩니다. 익은 사과인지 풋사과인지 적습니다. 꿀인지 설탕인지 젖은 나무인지 탄 나무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답은 없어요. 내가 다시 읽었을 때 떠오르는 말이면 그게 맞는 표현입니다.

마시고 나서 바로 쓰는 습관이 제일 커요. 잔이 아직 눈앞에 있을 때 쓰면 노트의 질이 크게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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